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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그아름다움을 전하며/제주자연경관

제주도 송악산 진지동굴, 아름답고도 슬픈 진지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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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송악산 진지동굴, 아름답고도 슬픈 진지동굴






송악산 진지동굴은 2차대전 당시 남제주군 대정읍에 만든 일본의 비행장 시설입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작전으로 제주도를 자신들의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관동군 등 일본군 정예병력 6만~7만여명을 제주도에 주둔시켰습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만 여명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제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각종 해안기지와 비행장, 용이한 작전수행을 위한 도로 건설 등 각종 군사시설 건설에 나서는 한편 제주 섬사람들에게 식량지원 등도 요구했으며 남제주군 대정읍 서남쪽 해안가에 있는 송악산 주변도 그 해안절경의 아름다움에도 상관없이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본토 사수를 위한 ‘옥쇄’지역으로 삼았던 아픈 상처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일본군은 송악산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송악산-사계리-화순항-월라봉에 이르는 해안 간에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안특공기지를 설치해 포대 및 토치카, 벙커 등을 설치했습니다.







알뜨르비행장. 제주사람들은 대정읍 알뜨르 평야에 건설했던 일본 해군항공대 비행장을 이 지역 이름을 따 이렇게 부릅니다. 해안가에 맞닿은 알뜨르비행장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1926년 처음 계획된 비행장 건설은 193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1차로 이뤄졌습니다.

일본군은 1937년에 비행장 확장계획을 세워 기존 20만평에서 2차로 1945년까지 80만평으로 비행장을 확장해 사세보의 해군항공대 2500여 명과 전투기 25대를 배치했습니다. 가미가제호 조종사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민들이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알뜨르 평야에는 당시 건설된 20여개의 격납고가 해안을 향해 자리 잡고 있습니다. 5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으나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져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부근에는 대공포 진지와 정비고, 막사로 사용했던 건물들의 흔적도 있습니다. 또 비행장 동북쪽 탄약 고터는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그 안에는 2개의 탄약고와 2층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있습니다. 몇 년 전 당시 일본군 장교로 알뜨르비행장에 근무했던 일본인들이 이곳을 방문한 뒤 이 지역의 한 학교에 성금을 전달하려다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송악산 일대에는 지하진지를 구축했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일본군은 송악산 지하에 대규모 땅굴을 파고 지하진지를 구축했으며, 송악산 알오름 쪽의 땅굴은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고 넓게 건설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파들어간 땅굴이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뚫려있는데, 너비 3-4m, 길이 20여m에 이르는 이 굴들은 성산일출봉 주변의 인공동굴처럼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던 곳입니다.

제주도에 남아있는 많은 일제 침탈의 현장. 이 해안지역만이 아니라 도내 중산간지역에도 각종 토치카시설과 주둔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수십만 명이 희생된 오키나와. 연합군이 만일 오키나와로 상륙하지 않고 제주도로 상륙했다면 일본군은 아마도 제주 섬사람들을 볼모로 오키나와처럼 옥쇄지역으로 삼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제주도 곳곳에 남은 전쟁의 찌꺼기. 아직까지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한반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내 최대의 일제시대 군사유적지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비운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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